Stories about why and how it was built

We have a dream that others may think not possible.

여기에선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147-6번지에 트리나 하우스가 지어진 얘기들을 써 볼까 한다. ThreeNa House는 저 허드슨 강을 바라보고 있는 Hana, Gina, and Nina를 위해서 지어진 집이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힘들면, 아빠가 살던 곳에 와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으로…

모든 일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저 아이들을 위한’ 것은 일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었다. 누구나 다 로망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간다. 나는 ‘바닷가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짖고 싶었다. 그것이 프로박테리야 (ProBacteria, Proletariat)인 나의 로망이였다. IMF 시기에 정처없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내가 한 나와의 약속이었다. 20년이 되기 전에 꼭 돌아와서 바닷가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지으리라. 약속은 늘 깨지라고 있는 모양이다. 20년이 조금 넘어서야 ThreeNa House를 짖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서 뭐 꼭 ThreeNa House랑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늘어놓은 것은 우리의 삶이 뭐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얼키고 설키어서 일어나고, 우린 그 속에서 만수산 칡드렁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잘 보면 그 칡드렁에서 원줄기라는 것이 있다.

이 잡다한 글들의 마지막에는 5년이 지난 2025년의 얘기를 간단히 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VS. 내가 좋아하는 일

2019년 겨울, 세상에 우한폐렴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몇 덜 전에 Air Traffic Simulation & Optimization이라는 연구를 완전히 접었다. 그러게, 꼭 뭐 좋아서 했던 일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그 길에 들어섰다. 나름 게으리진 않았으니, 성과도 좋았다. 그러나, 늘 남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느낌! There is no glorious retirement. But you can quit in your prime time! 수년간 같이 연구를 했던 선임 연구원 Harry Swenson의 말이다. 어느날 그는 그의 신념을 실천했고, 나도 나의 prime time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왜 인지는 몰라도 뭘 잘 했다고 상을 받은 날이었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 큰 딸 Hana는 뮤지컬을 좋아했다. 우리 가족은 대략적으로 음치이면서 몸치다. 하나는 무대 뒤에서 우산을 돌리는 역활에 만족하면 몇 년을 뮤지컬 무대에서 보냈다. I am a penny in musical. But people say I am good in painting. Do you think I can study visual art? 아빠 몰래 다니년 보컬 과외를 그만두던 날 하나가 한 말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나에게 할 때가 온 것 같다. 할아버지가 화가였다는데….

하나는 Pratt Institute in New York로 진학을 했고, 막내 Nina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글게, 걱정이다!

글이라는 것이 꼭 논리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는 글들의 경우에,

2025년 11월 08일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새로산 커피를 마실 생각에 일찍 침대에서 몸을 일으겼다. 원두를 조금 크게 갈아서 좀 연하게 내렸다. 늘 그렇듯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자연스려 오늘의 일정들로 생각이 간다. 문뜩 시계를 보니, London은 오후 2시네. 전날인지 내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꼭 알아야 되는 것 같지도 않다.

큰 딸 하나는 근처 SJSU에서 간호학을 시작했다. 둘째 지나는 Oxford trinity에서 PP&E를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12 Grade 막내 니나는 바쁘다. 공부에 바쁜 것이 아니라, 데이트와 알바 그리고 동아리 활동에 바쁘다. 애들 엄마는 과테말라 어딘가로 메디컬 미션을 가서 며칠째 집을 비우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NASA에서 연구를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건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런 저런 건축관련 수업도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바고 건축학과에 진학을 했다. 그 해 봄엔가 COVID-19이라고 했다. 그 분야에 일하는 지인이 적어도 2/3년은 걸릴거란다. 해질녘 길을 걷다가 이 2/3년에 남해에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문뜩!

내가 할 수 있는 일 VS. 내가 좋아하는 일

2019년 10월에 긴 백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2020년 봄 학기부터 근처 Local college에서 건축학 수업을 열심히 수강했다. 아! 새로운 세상이었다.

우리는 늘 ‘나에게 가능한 일’과 ‘내가 좋아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한다. 가능한 일에 베팅하는 것은 최대 수익률 50%이다; 최소 수익률도 50%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고 가능한 일은 많지 않다. ‘좋아하는 일’에 베팅하는 것은 최대 수익률 100%다; 최소 수익률도 50%다. 나라면 가능한 일을 선택하겠어. 내가 좋아하는 일이 꼭 되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나는 늘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나 난, 늘 최대 수익률 100% 베팅했다. 차후에 발생할 수 있는 경쟁자는 초기에 제거하는 것이 후한이 없다.

미쿡에서 2021년 1월 15일에 세계에서 최초로 모네나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의료계 종사자들을 우선 대상하는 하는 아주 실험적인 백신 접종이었다. 루머와 풍문이 흉흉했다. 나는 의료계 종사자도 아니었고 초고령자도 아니었지만, 2021년 1월 15일 오후 늦게 백신 접종을 했다. 2주 뒤인 2월 11일에 2차 접종을 하고, 다음 날인 2월 12일에 한국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 외에는 거의 승객이 없었고, 승무원도 2명인가 그랬다. 지난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한국을 9번 왔다 갔다 했다; 한국 비자가 없는 미국 시민권자는 한국에 최대 3개월을 머물 수 있다. 소위 자가격리라는 것을 6번인가 했다. 콧구멍에 면봉을 넣는 것은 49번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운이 좋았다. 저 사람들처럼 국가가 지정한 코로나 격기시설에 끌려간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될 확률이 50%가 넘지 않으면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나는 0%가 아닌 것에는 적어도 나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었던 것 같다. 그 부족한 확률을 ‘eager’와 ‘enthusiastic’이란 단어로 채웠다. 많은 경우에, 이것 저것 다 합쳐도 50%를 넘길 수는 없었다. 그냥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왜? 나는 그것을 원하고, 가능성이 0%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시작한 일들도 몇 번 있었다; 그 일들은 대게 역시나 실패했다.

용소리; 용이 있었던 곳이란다

남해 사람들은 사람을 ‘울 동네 사람들’과 ‘울 동네가 아닌 사람들로 구분한다. 뭐 사실 촌이란 곳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남해는 좀 더 특이하다. 엄마와 아빠가 남해에서 태어나고 자라야만, 그들의 자녀는 비로소 ‘남해 사람’이 된다. 내가 남해에서 태어나도 엄마 아빠가 성골이 아니면, 나도 결코 성골이 될 수 없다. 아님, 진덕여왕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렇게 보면, 퇴골이다. 살다보니, 소위 남해안 관광벨트 프로젝트에 잠시 참여하게되었다. 1997/8년 정도의 일인 것 같다. 그 때 남해를 좀 더 자세히 알게되었다. 내가 태어난 전라도 광양 옥곡과도 가깝고, 천성적으로 기관지가 좋지 않은 내가 노년에 살기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온 이후로도 남해를 자주 방문했다. 사실, 한국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남해를 갔다.

내가 처음에 땅을 알아본 동네는 주로 다랭이마을이 있는 남해 남면과 여수시의 야경이 보이는 서면의 남쪽 일부였다. 확- 트인 태평양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동네도 약간 높아서 마음에 쏙- 드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계약서 싸인을 할 정도의 진도가 나갔을 때에는 웬지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최종 계약을 하지 않는 핑계는 자꾸 생겨났다. 한번씩 같이 갔던 동생도 “도대체 어떤 땅을 원하는거야?” 나도 잘 몰랐다. 사실은 내가 마음에 둔 땅은 있었지만, 그런 땅을 살 돈이 없었다.

바닷가 언덕 위 나만의 햐얀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은 사방팔방이 바다인 남해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욕심이 과했다. 확- 트인 전망, 남의 눈을 전혀 보지 않아도 되고, 장래에 내 집 앞에 다른 집이 설 가능성이 없는 그런 땅, 길지는 않아도 어느 누구도 들어 오지 않을 작은 산책로가 있는 땅, 80평 정도의 2층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땅, 주위의 집들과는 최소한의 거리를 둔 땅, 그런 땅을 나는 원했던 모양이다.

10년 이상의 발품을 팔아서,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산146-8번지를 샀다. 영구 조망을 위해서 그 앞 400평도 같이 샀다. 돈? 내가 여지껏 돈을 먼저 가지고 일을 시작한 적은 없었다. 어쩌하다보니, 이 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에 땅 주인이 요구한 금액은 총 7억이었다. 나는 그런 돈이 그 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땅 주인이 귀뚬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을 했던 땅이지만, 여지껏 주인을 찾지 못한 땅이란다. 땅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할까? 법무사 사무실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다시 그 땅에 가 보았다. 아래 위 여기 저기를 살펴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한 평평한 자리가 없고, 경사도 심하다. 그 아래는 바로 절벽이네. 어쩌어찌 바다 쪽으로 내려가서 암반의 갈라진 방향과 크기, 그리고 그 상태를 살펴보았다. 진입로가 될 수 있는 곳은 적게 잡아도 경사가 25도는 될 것 같다. 건축허가가 날 것 같지 않다. 이런저런 분쟁도 많은 동네란다. 토목/건축을 잘 아는 지인에게 문의하니, 건축허가를 받을 확률이 없단다.

할 만큰 하고도 아니되면, 죽어서 내가 뭍히기에 좋은 땅이다!

디지인, 설계, 주경야독 & 건축허가

그러니까 2021년이겠네. 위기라는 것이 기회일 수도 있고, 기회라는 것이 위기일 수도 있다. 2020년에도 많이 어수선했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어수선했다. 이런저런 루머가 난무했고,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나간다고 했다. 내 눈으로 보지는 않았고, 나름 공신력있는 매체에서 그렇게 전했다.

어쩌다 미국에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또 어쩌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되었다. 모든 것이 온라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위기였다. 나는 남해로 날아가서 사 놓은 땅이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를 잡았다기 보다는 근처 비여있는 집 주인을 찾아내어서 이러저러하니 빌려달라고 했다. 낮에는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은 곳에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서 이리로 저리도 뛰었다. 저녁에는 건축학 수업을 듣고, 또 강의를 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많은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소위 모든 것이 온라인 시절이라서 가능했다.

부지의 한쪽이 바다로 떨어지는 수직 절벽이다. 진입로는 어림잡아도 25%가 넘겠다. 오수/하수는 어찌되었든 어촌계의 양식장이 있는 바다로 배출되어야 한다. 어느 어촌계에서 똥물을 자기네의 양식장으로 배출하게 하겠나? However,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면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있지 않겠나? 늘 그렇지만, 무식이 용감한 것이다.

부지의 한쪽이 수직 절벽이라서 집을 짖기에 지반이 약하다? 그럼 기반암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그 암반에서 기초를 올리면 되지 않겠나? 기초공사를 위한 비용이 넘 많이 들겠지. 다음 일을 다음에 생각하자.

진입로의 경사가 15% 이하가 되어야 건축허가가 가능하다는 군의 조례가 있다면, 땅을 더 높이면 경사가 작아지지 않겠나? 법적인 경사가 나올 정도의 흙이나 돌이면 그 수량이 상당하겠네.

아! 문제는 어촌계의 오수/하수 배출 허가네.

지반/기초 보강 설계는 그 분야에서 일하는 오래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아무래도 집 설계는 남해군 인허가 부서랑 관계가 확실한 남해군에서 일하는 건축사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집의 디자인이랑 설계를 의뢰한 건축사가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층고는 너무 높고, 거실은 너무 크고, 실내 주차장은 필요 없고, 집의 현관은 당연히 집을 전면으로 가야한단다. 전면을 완전히 통유리로 하면 건축비용이 넘 많이 들고, 단열에도 취약하단다. 계단은 오르내리는 시설이지,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곳은 아니란다. 방 하나 하나의 사이에 세탁실이나 화장실 같은 공간을 넣어서 굳이 분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단다. 가정집은데 방음 설계는 필요없단다. 지붕이 비대칭으로 짖는 사람은 없단다.

밤낮으로 주경야독을 하니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때 몸이 축났다는 것은 집을 다 짇고, 내 주치의가 알려주었다. 잇몸 재생 수술에 임플란트를 3개를 했다.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먹고 자고를 두어달 했던 기억이다.

이것은 건물 기초인가? 지반보강공인가?

일단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서 건축허가를 신청하기로 했다. 건축허가라는 것이 몇번의 수정/보완을 거쳐서 나온다고 한다. 이런 곳의 건축허가는 나온다고 해도 대략 몇개월은 걸린거란다. 돈을 주어도 하기 싫다는 건축사를 어찌저찌 설득해서 건축설계를 하고 허가를 신청했다.

내가 살아온 56년 동안 나보다 운이 좋은 친구 딱 한명을 보았다. 나도 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건축허가를 접수하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90일이 다 되어서 일단 한국에서 출국을 해야만 했다.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남해 건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건축허가가 나왔다고 넘 황당해 한다. 세상이 어수선하던 코로나 시국이었다. 난 그렇게 간단히 이해하고 싶다.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막상 설계대로 기초보강을 할려니 막막하다. 저 절벽 위에서 어떤 포크레인 기사가 일을 해 줄 것인가?

땅을 파서 임시로 공사할 자리를 만들고, 그 임시로 만든 자리에서 조금씩 절토와 성토를 반복했다. 기반암이 나오고, 그 기반암 위에 철근콘크리트를 부어서 기반암과 보강 콘크리트가 한 덩어리가 되게 했다. 22톤 트럭이 1미터 짜리 암석을 40번이나 실어다 부었다. 뒤채움재는 주로 흙이 사용되는데, 여긴 석축이 한번 무너지면 큰 낭패라서 맞물림이 좋은 잡석으로 채웠다.

기초를 위한 기초공사도 필요했다. 건물과 한 덩어리가 될 기초의 빈 공간에 비끄림이 적고 Interlocking이 좋은 크기의 돌로 채웠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돈이 더 들어갔다. 차후에 이 보강공이 얼마나 침하할까? 5센티 정도만 침하하면 참 좋겠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큰 기둥도 부지의 기반암에서 바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기초공에서 부터 시공을 했다.

시작이 반인 모양이다.

가정집을 짖는데 Tension bars라? 경사가 심해서 경사쪽으로 쏠리는 힘을 잡아줄 tension bars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구조설계로 밥을 먹고사는 친구가 알려준다. 부르지도 않는 친구 놈이 와서 돈만 더 쓰게 만들었다. 기초벽의 두께도 설계보다 더 많은 40센티로 시공을 했다. 철근의 두께도 설계 보다 더 두꺼운 것으로 시공을 했다. 막상 땅을 파고 공사를 하다 보니 그게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았다.

구조상으로 이 집은 3층 건물에 해당한다. 그냥 1층이 기초처럼 사용될 뿐이다. 이 용소리를 이루고 있는 기반암 위에 철근콘크리트로 기초를 위한 기초가 시공되었고, 그위에 소위 보통 건축물의 기초가 시공되었다. 돌 위에 돌로 집을 지은 셈이다. 22톤 트럭으로 40차 분량의 돌이 들어갔다. 이 땅은 인근의 대지들 보다 많이 낮다. 비가 오면 그 물들이 지대가 낮은 우리 집으로 흘러들 것이다. 집수정을 무지 큰 것으로 뭍었다. 넘 커서 전생시 참호로 써도 되겠다. 집을 짖고 나서도 아직까지 집수정이 꽉- 찬 적은 없었다.

이렇게 대강 기초공사를 마무리했다. 기초공사가 쉽지 않아서 이정도 하고나니 다 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들 그랬다.

아이들에겐 BTS 공연이 더 중요하다.

“사람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권력을,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사랑을 중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드라마 백일의 낭군에서 홍심이의 대사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린 뒤에야 알았다. 사실은 아직도 그냥 지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고 통장은 텅장이 된지가 오래인데, 아이들은 LA에서 하는 BTS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한다. 코로나 이전에 산 티켓인데, 팔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었다. 아, BTS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 그 힘든 여정을 시작해야 하나? 미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입국한 나는 90일이 지나기 전에 한국을 떠나야 한다. BTS 공연을 아이들과 같이 보기 위해서는 입국한지 겨우 한달만에 다시 출국을 해야한다.

공사는 좀 어렵지만 단열에 유리한 외단열로 시공을 했고, 내단열도 추가했다. 내단열과 Drywall 사이에 공기 단열층을 추가했다. 내가 벽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등이 차가운 것은 싫었다. 차후에 안 일이지만, 이 때문에 트리나하우스의 단열은 참 좋다. 지붕이 올라가는 날, 일꾼들이 돼지머리를 사 오란다. 말인즉, 돈을 좀 내 놓으라는 것이란다. 지붕에도 철근을 보강하고 방수 공사를 했다. 굳이 기와가 없어도 비가 새지 않게 했다. 철근이 많이 들어가는 공사가 거의 다 마무리 되고 나니, 철근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건물 뒤쪽에는 가능하면 창을 작게 내었다. 설계 때부터 방음이 적용된 때문이다. 창문 시공이 잘 되지 않아서 창으로 비가 새고, 단열이 잘 안되는 집들이 많다. 이것만 전문으로 하는 여자 기능공을 소개해준다. 손놀림이 장난이 아니네.

이 즈음에서 용소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용소리 자체는 조용했지만, 나는 큰 문제에 직면했다. 나의 로망, 나의 집은 무너지고, 펜션 ThreeNa House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기 말이 안되긴 하다.

용소리는 내가 혼자서 죽-치고 앉아 있을 곳이 아니란다. 여긴 옛날에 용이 있었던 자리이고, 그래서 용소리가 되었단다. 주인이 아닌 자가 차지하고 있으면 큰 화를 받을 자리란다. 많은 사람들의 기운으로 이 땅의 쎈 기운을 눌러야 하는 자리란다. 이놈의 땡중들, 지 갈길이나 갈 것이지.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가만히 생각하면 여긴 용소리가 맞는 모양이다. 내것이 아닌 것에 너무 미련을 두면 나중에 좋지 않더라. 건물이 다 지어지고 2022년 여름의 “힌남노”를 혼자서 이 건물에서 맞이했다. 내가 이 땅의 주인 같기도 한데!

어디 근처에 농막이라도 놓을 땅을 물어보니, 땅 한가운데 묘지가 있는 작은 땅을 소개해준다. 헐! 이런 땅을 소개해 주는 놈은 그렇다고 치고, 그 땅을 사는 놈은 싸이코가 아님 무엇인가!

내부 공사! 요게 Hard Core였다.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소위 Healing 할 수 있는 독채 펜션을 짖기 시작했다.

이 공간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펜션이 되어야 한다면, design theme는 무엇이 되어야할까?

Simple, natural, and private!

인테리어를 최소화 하는 것이 이곳의 자연미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라서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도 실내에서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굴직한 선들이 필요하다. Color scheme는 흰색 검정색 그리고 목재의 자연스러움이면 충분하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경험하고 살았지만, 저런 쌍욕은 처음 들어본다. 층고가 높다고 석고보드 붙일 때마다 쌍욕을 한다. 좀 높기는 했다. 그래도 저렇게 시원하게 천정이 높고 앞쪽이 다 유리로 되어있어야 바다를 거실에 담을 수 있지 않겠나. 창호를 하는 업자는 면적이 넘 넓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서 일반적인 통유리로는 곤란하겠단다.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겠지.

트리나 하우스의 계단은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을 꺽이는 모양이다. 보통 집들의 계단은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을 꺽이는 형태로 계단이 만들어진다. 내가 계단을 왼쪽에서 시작하게 한 이유가 있다. 오른쪽에서 시작하면 왼쪽으로 꺽여서 올라가는 부분에 어떤 형태로든 벽체가 형성되고 그만끔 시야가 가린다. 그것이 벽체가 되든 난간이 되든 시야를 가린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계단이 이렇게 설계되면 계단을 앉아서 쉬는 공간으로 만들 수 없다. 나는 계단도 이 거실 공간의 일부가 되게 설계를 했다. 단의 높이며 폭 뭐 이런 것들이 바로 계산되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뜯었다고 붙였다가를 반복한다. 골조공사를 하는 업자도 유사한 얘길했다.

어찌어찌 계단이 만들어지고, 계단 난간이랑 2층 복도의 난간을 철제로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설치해 놓은 2층 난간이 흔들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앵커를 석고보드에 박아서 그렇단다. 그게 난간을 설치하는 업자의 대답이다. 다른 방법이 없단다. 설계상의 하자란다. 가정집을 짖는 설계라는 것이 그런 세세한 것까지 도면에 들어가지는 않는데…며칠을 고민한 결과 난간의 바깥쪽으로 저런 어정쭝한 책꽂이를 만들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햇살이 반짝이는 이른 아침에 저 난간 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 참 좋다.

나는 Window bench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멍하니 바다도 바라보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로 전방 창의 하단을 일반적인 의자의 높이로 설계를 했다. 창문의 Sill을 넓게 만들어서 나름 window bench의 기능을 하길 바랬다. 창가에 사람이 앉으면 안 된단다. 남해는 그렇단다. 나중에 내가 여기서 거주할 날이 오면, 그때 다시 넓은 것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냥 업자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80이 넘은 노모가 50이 넘은 아들에게 5만원권 지페를 내민다. 코로나 시국에 집 짖는다고 한국을 들랑날랑 하는 아들이 안스러운 모양이다. 집 짖는 사람은 돈이 없을거라고 공항에서 밥 사먹으라고 하신다. 사실 이 때 쯤에는 돈도 없었지만, 노모에겐 내가 더 안스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 짖고 저 5만원을 창가에 두었는데, 없어졌다.

ThreeNa House

2022년 봄 벗꽃이 활짝 필 무렵 트리나 하우스가 완공되었다. 지중해 기와랑 벗꽃이 참 잘 어울린다.

명이나물이랑 머구내가 있는 것을 보니 대략 봄인 모양이다.

There was a missing one whom this house was built for. Maybe, she couldn’t be here ever. I might know that. I, however, had to build it. I have never let it go even a very slim chance if I have to.

가족이란 무엇인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건축허가 때 따지지 않았던 모든 사항들을 따지는 모양세다. 서두르지 않았다. 가을이 다 지나가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서 사용승인이 나왔다. 건축허가는 195.62 제곱미터인데, 공사 중에 기초가 밀리면서 면적이 늘어나서 198.63 제곱미터로 사용승인을 받았다.

트리나 하우스를 공사하는 거이 내내 인근 라오라에 머물렀다. 공사장 근처에 머물 수 있어서 넘 편리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트리나 하우스를 짖는 동안 총 네컬레의 신발이 저 모양이 되었다. 한컬레는 어디로 갔을까?

Recalling…

2022년 12월 22일 새벽, 용소리에 부슬 부슬 비가 내린다…

그래 여긴 “용이 있었다”는 용소리가 맞다. 세상에는 주인이 있는 자리가 있다는데, 여긴 내가 마냥 주져않아 있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 모양이다. I don’t deserve it at least till now. 비가 내리는 용소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3년이란 시간이 어느 한 곳에 마음이 잡히기에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What made you build this one? What are you looking for here? I still don’t know. Let’s see!

오후 3시에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소위 코로나 시국에 미국과 한국을 9번 왔다 갔다 했다. 그래, 나도 한번은 코로나에 걸려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방역법상으로 여행 가능한 기간이 지났다. 지칠대로 지친 내 몸이 이 긴 비행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2시간의 비행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잠은 오지 않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어떠한 몸부림도 편안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친 내 몸이 코로나를 이겨내고, 지난 3년간의 피로를 덜어내기에는 한두달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달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일럿이 될 수는 없었다. 내 팔자엔 그런 것이 없었다. 어찌 그 근처에는 갔다. 새 터에 심을 큰 은행나무를 저 파일럿이 주었다. 아직도 현역으로 잘 날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남해엔 저런 특이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트리나 하우스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자리다. 아침엔 저 계단참에 앉아 보리암에서 올라오는 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저녁엔 60도가 넘은 독주를 한잔씩 했다.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시간들이었다. 티벳 여인 Yongji란다. 내 몸에 왜 저런 티벳의 춤사위가 익숙한 연유도 알게되었다. 누가 물어보면 지난 꿈 속에서 거길 갔다 온 모양이다라고 말해야겠다.

Scotty Castle in Death Valley: Corn Artist

"I got four things to live by: Don't say nothing that will hurt anybody. Don't give advice--nobody will take it anyway. Don't complain. Don't explain." 

내가 살아가면서 배운 것이 네개 있는데: 차후에 누군가를 해할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충고하지 마라-어치피 듣지 않는다. 불평하지 말고 설명도 하지 마라.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Death Valley라는 곳이 있다. 대략 10시간 정도의 운전이면 도착한다. 나는 이곳을 참 좋아했다. 사실, 좋아라기 보다는 참 많이 방문했다. 적어도 독도 어딘가 산다는 그 가수 보다는 더 많은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이곳을 다닐 때에는 뭐 규제 이런 것들이 없어서 대충 내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왼쪽 사진 거의 끝에서 좌회전하면 갈 수 있는 Scotty Castle라는 곳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현재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나는 저 돌덩이 속에서 잠든 Scotty (Walter Perry Scott)의 비석에 적힌 글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대략 서너번을 저길 갔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또가고 또 가고 그랬다기 보다는, 저 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또 가고 또 가기를 반복했다. 내 나이 30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겨우 50에 가까워서야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이 Scotty Castle라고 알려진 곳에 Walter의 돈은 10원도 안 들어갔다.

My last story is ongoing…

부모는 아이들은 lead 하거나 push 할 수 없다. 그냥 이런저런 길들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가지는 궁금증에 답할 뿐이다. 그냥 막연히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이다. 아이들이 좋은 학교로 가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인생을 쉽게 가는 길이지만, 꼭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과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삶은 끝을 모르고 죽어가는 장거리 경기 같기 때문이다.

ThreeNa House는 내가 아는 두 사람을 위해서 지은 집이다. One is my single mom who is now in a nursing home. The other is my younger sister who has been in a mental hospital for longer than 20 years. 그러나, 어느 누구도 ThreeNa House에 머물 수가 없었다. I just wanted them to stay in ThreeNa House for just one night; But it is failed; I knew. But I have to keep my word.

ThreeNa House 어딘가에는 오래된 열쇠가 하나 있다. 우리 식구가 처음으로 산 10평 짜리 주공아파트 열쇠다. 2000년 봄이 오기도 전에 나는 쫒기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노모, 부곡 정신병원에 있는 여동생, 근처 전문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주경야독하는 남동생을 뒤로 하고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많이 슬펐고 눈물이 났다. 나는 이 열쇠를 30년 가까이 내 몸에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바닷가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지어서, 거기에 걸어두고 싶었다.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면,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가 나온다. 나는 이 영화를 몇번이나 반복적으로 중지한 후에야 마지막까지 볼 수 있었다. 이유? 거의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나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냥 감상”할 수 없는 영화였다. 작년인가 그 영화가 편하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이제 아들의 기억도 없는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나머지 삶을 또 다른 정신요양원에서 보낼 여동생을 위해 통장을 개설하고, 그렇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 영화가 편하게 다가왔다.

남해의 어디 요양원에 있는 엄니는 면회를 가면 “남해로 가자”고 한다. 엄니에겐 저기가 남해인 모양이다. 사실 저 자리는 엄니를 위한 자리였으니, ThreeNa House는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